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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과 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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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명객 2011. 6. 14.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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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60년대 초반의 초등학교 학예회 사진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제3공화국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무대 위 아이의 뒤편 가림막에는 학교 이름이 박혀 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마을 공동체가 풍비박산 난 그 강정마을이다. 

사진의 소유자는 내 외할아버지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의 첫 교장 부임지가 바로 강정초등학교였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께서 교장으로 승진하던 6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강정에서 3년을 보냈다. 제3공화국이란 글자와 어머니의 기억에 따라 사진은 62년에서 64년에 찍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38살이란 나이에 교장이 되셨으니, 외할아버지께선 28년 동안 교장선생님이셨던 셈이다. 당시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학령기에 접어들며 초등교육 의무화가 팽창기로 접어들던 시대이다. 당연히 학교 시설이나 교사가 모자랐을 시대다. 한국전쟁 이전에 벌어진 4.3사건에 제주 교육계가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다. 


▲ 교직원.학생 인명 피해 
4.3사건 당시 교직원 피해는 사망 142명, 행방불명 18명, 고문 2명, 형무소 수감 9명으로 집계됐다. 학생 인명 피해는 희생자 학생 명단이 파악된 경우만을 기초로 해 사망 107명, 행방불명 2명, 부상 36명, 고문 피해 3명 등으로 나타났다. 

학생 희생자는 사망과 행불을 포함할 경우 109명으로, 이는 4.3위원회 백서에 보고된 20세 미만 희생자 수 3002명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당시 상황과 여건에 따라 학교나 관공서의 공식 문서에 학생 피해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결과로 여겨진다”며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학사운영 피해 및 폐교
 
4.3사건으로 피해를 당한 학교 수는 총 84개교로 초등 71개교, 중등 13개교 등이다. 학사 운영 중단 학교는 31개교로, 지역별로는 북제주군 20개교와 남제주군 11개교이다. 학교 자료를 소실한 학교는 23개교로 조사됐다. 또 당시 북제주군 지역에서만 3개교가 폐교됐다.

폐교 학교는 고성국민학교와 하귀.단국중학원, 조천중학원 등이다. 고성국민학교는 1934년 신우공립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로 현재 고성리 농협 창고 자리에서 개교됐으나 4.3사건 당시 소실됐다.

하귀.단국중학원은 1945년 개설되고 1947년 인가를 받았으나 4.3 발발로 교사와 학생들이 잡혀가 수업을 못하게 되자 1948년 10월에 폐교됐다. 

조천중학원은 북제주군보건소 조천지소 자리에 1946년 3월 설립됐으나 1948년 11월에 소실됐다. 당시 임시 폐교를 단행한 학교는 26개교로 나타났다. 

▲ 학교 시설 피해 현황 
가해 주체별로 토벌대에 의한 피해가 16개교, 무장대에 의한 피해가 27개교로 나타났다. 

학교 전소는 북제주군 28개교, 남제주군 14개교로 나타났다. 부분 소실 및 해체된 학교는 북제주군 5개교, 남제주군 2개교로 조사됐다. 또 21개교가 주민 집결 및 학살터로 이용됐으며 30개교가 토별대의 지휘소와 주둔지로 사용됐다. 

                                                       - 출처 : "4.3사건으로 교직원 142명, 학생 107명 사망", 2009.03.10, 제주일보



해방 이후 신식교육을 담당할 교사도 모자랐거니와 4.3으로 인한 인적 피해도 막심했던 시기, 제주 교육계에선 20대년생들이 선두기수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 외할아버지의 교장 생활 28년을 그렇게 이해한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진이 있다. 강정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기념비 사진이다. 가운데 위치한 비는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다. 검색을 해보자니, 관련 설명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설립된 강정국민학교는 1948년 학교를 확장하려고 했으나 4.3이 발생하면서 자재 부족 등으로 중단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봉호 소위(중문 지역에 주둔했던 2연대 파견대장)는 강정국민학교를 지을 목재를 군인들을 시켜 경비하게 한 후 지역 주민들이 녹하지오름 일대에서 베어 오게 하거나 남원에서 가져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학교를 증축하였으므로 마을 주민들은 서봉호의 공덕을 기려 교정에 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전면에 한글로 '육군 소령 서봉호 기념비', 뒷면에는 '서기1948년 본교 건축 당시 4·3사건으로 인하여 건축에 애로가 많음을 알고 이를 선봉에 서서 적극 추진시켜 완공을 보았으므로 그 위대한 공적을 길이 선양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다. 서기 1964년 3월 학구민 일동 건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예래교65년사에 따르면 서봉호 소대장은 예래국민학교 복구에도 목재를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 출처 : 고영철의 역사교실 

 

어머니의 기억으로는 당시 강정초등학교가 국방부와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무릉이나 법환초등학교 관련 사진은 졸업생들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만이 존재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왜 유달리 강정초등학교 관련 사진을 많이 갖고 있었냐는 의문은 여기서 풀리게 된다. 




옛 강정초등학교에 군인이 방문했다. 아마 비석의 주인공인 서봉호 소령 일행이라 추측할 뿐이다. 4.3사건 당시 소대장이었던 서봉호 씨가 차후 소령으로 진급해 국방부에 있었다면,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강정초등학교와 국방부의 자매결연이 충분히 가능했을 법하다. 더욱이 5.16 이후 군인천하가 된 세상 아니던가. 젊은 교장의 의욕은 공덕비와 학교에 대한 지원을 맞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강정마을 사람들이 함께 그 덕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다. 4.3의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초기 치매증세에 시달리는 내 할머니께선 아직도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에 분노를 나타낸다. 너무나 똑똑하던 남동생 둘을 서북청년단에게 잃었기 때문이다. 군인이고 경찰이고, 제주 사람들의 분노는 육지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향한다. 그나마 현역 군인의 공덕비가 세워진 건 서봉호 씨가 학교에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다.   






강정초등학교 관련 사진은 학교 자체에서 촬영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국방부나 제주도에서 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중 일부는 인화지가 규격화된 사이즈보다 작고 상태도 조악했다. 


 

사진 속에서 주민들은 손님 맞이용 청소를 하는 듯하다. 사실 확인 이전에 현역군인의 덕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 곳이 강정마을이다. 21세기 해군은 주민 분열을 획책하고 그 틈을 타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반백년의 세월 동안 비극과 도움 다시 비극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군과 강정마을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해군은 도의회나 야당의 기지건설 일시 중단요구도 묵살하고 있다. 

안보 없는 평화 없다지만 평화의 섬과 군사기지의 양립 또한 어불성설이다. 대의를 위해 주민들이 희생되어도 좋단 말인가. 더욱이 말 없이 사라져갈 생물들과 그 생태계는 어쩌란 말인가. 50년 전이라면 가난 때문에라도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또 누군가의 공덕비가 마을에 세워졌겠지. 지금은 아니다. 


- 학예회 사진




 
- 운동회 사진












 


사진 속 주인공들의 나이는 현재 50대 후반에서 60대일 것이다.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들이 현 사태를 맞딱뜨린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의 정확한 뒷이야기는 소유자인 외할아버지만이 알고 계신다. 외할아버지께선 지난 5년 전에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 사후 외할머니께서는 이 사진들을 정리하며 태워버리라고 외삼촌에게 이야기하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홀연히 빈 방을 지키던 어머니와 이모 앞에 외삼촌이 내놓은 비닐봉지 안에 이 사진들이 담겨있었다. 어머니와 이모는 사진 틈에서 추억을 들춰내며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사진 정리는 내 몫으로 남았다. 



                                        우측에서 4번째 분이 외할아버지인 宗圓 김태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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