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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말분 씨의 한글날

일상다반사

by 망명객 2011. 10. 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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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의 뒷태! 이분은 중국에 있는 아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겠다며 컴퓨터를 익힌다. 왼손 검지 끝마디가 없어도 배움의 열정 앞에서는 그리 큰 장애가 아니다.



"선생님, 컴퓨터 관련된 말은 왜 죄다 영어인 거죠?" 질문을 던진 사람은 중년의 중국교포다. 컴퓨터 관련 기술과 학문이 미국에서 발전한 까닭이라고 짧게 답해줬으나, 뭔가 개운치 않다. 질문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교포 여성은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질문자가 그녀에게 몇 마디 친절을 베푼다. "일제시대엔 일본놈 세상이니 일본말 썼고, 지금은 미국놈 세상이니 미국말 쓰는 거지."

컴퓨터교실 자원봉사 교사로 다국적 교육생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느린 한국말로 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하거나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교포들과의 의사소통은 수월한 편이나, 학창시절에 외국어라고 '조선어'를 배운 그들에게 컴퓨터 자판은 그 자체가 두려움이다. 포멧, 하드 드라이브, 프린터조차 처음 듣는 교포들에게 컴퓨터 용어는 그저 뜻을 직감하기 힘든 외국말일 뿐이다. 




외래어가 말글살이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특히 새로운 개념을 지칭하는 단어일수록 수입품이 많다. 중국글자를 빌리곤 했으나 서양말을 직수입한 말이 더 늘어난 요즘이다.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그 말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린다. '물 건너 온 말'을 외래어란 테두리 안에서 과감히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한국어의 장점이다. 한글이란 우수한 글자 체계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외래어에 눌려 순우리말과 순화어는 그 뿌리의 존재조차 희미하다. 소설가 김소진의 작품은 작가의 삶처럼 나의 순우리말과 방언 독해력이 허리께에서 끊어졌기에 읽는 내내 불편하다. 우리말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어휘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고통처럼 따라붙는다. 수입 어종인 '베스'가 토종 민물고기들을 생태계에서 밀어내듯, 외래어가 토종 말글을 잡아 먹는다. 

대학이라고 다를 바 없다. 학부생 학생기자들이 쓴 기사문에서는 외래어와 외국어가 넘쳐난다. 단어만 바꾸는 수준을 넘어 문장을 기우고 메워야 하는 경우도 많다. 수정 빈도가 가장 높은 건 단연코 학술 관련 기사인데, 대학 행정 관련 기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빨간펜이 등장한다. 

"'플래그쉽'은 그쪽 행정팀에서 꼭 써달라는 용어였어요." "네가 그 행정팀 소속이냐? 직원이야? 한국어 사전에 오른 용어냐?" 이런 문답이 오가던 그 시절, '심포지엄'이나 '워크숍' 정도는 애들 말장난에 불과하다. '학술대회', '수련회' 정도로 순화하면 끝난다. '잡스쿨(Job School)'이란 국적불명의 조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고유명사인 행사명은 그대로 살려야 하지만, 실무자의 의지는 결재권자의 그것일 뿐이다. 행사 관련 담당 직원이나 담당 교수가 항의를 하는 건 당연하나 내 답도 당연했다. "주간교수님께 말씀하세요."


말분 씨 만세!!!



첨단과 전문화, 세련됨이란 구별짓기가 한국어를 위협한다. 드라마 <애정만만세>에서 김수미 씨가 연기하는 '박말분'이란 인물은 우리의 말글살이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탈 박'으로 바꾸고 영어가 섞인 욕을 사용한들, 출신의 비루함은 숨기지 못한다. 그녀의 말은 시청자에게 비웃음의 요소일 뿐이다. 강단과 사무실, 거리 곳곳에서 말분 씨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어 순화에 쏟는 노력은 그 사회의 지적 수준을 반영한다. 그 이전, 우리는 순우리말을 얼마나 사용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영어는 영어답고 한국어는 한국어답게 사용할 때 아름답다. "컨펌 받았냐?"란 말 앞에선 비웃어줄 수 있는 되바라짐도 필요하다. '미국놈 세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크리스탈 박'이 '박말분'인 것은 잘 안다. 내 안의 '말분 씨'를 돌아보는 오늘은, 부끄럽게도 한글날이다. 



<노력>

1. 한국어사전(국립국어원 홈페이지)과 친해진다.
2. 외래어도 표기법에 맞게 표기한다. - 한국어사전 참고
    예) 워크샵(X) 워크숍(O)
3. 애매모호한 용어는 주요 신문사 기사에서 그 쓰임을 확인한다. 
4. 새로운 순우리말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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