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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갈 것

일상다반사

by 망명객 2008. 2. 18.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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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부귀식당 대표 메뉴 순대국과 닭개장


행당동 한양대 사거리(삼거리?) 한 쪽에 '부귀식당'이 있다. 간판이라고는 미닫이 문에 쓰인 '부귀식당'이란 네 글자가 전부인 이곳은 테이블 여섯 개 정도를 갖춘 좁고 허름한 식당이다. 주메뉴는 닭개장과 순대국. 빨간 국물이 일품인 닭개장은 주당들의 쓰린 속을 깨끗이 포맷해주기에 '뻑개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순대는 없고 머릿고기만 가득한 순대국은 한 끼 식사나 안주로 일품이다. 이집을 다닌지 11년 째. 절대 웃을 것 같지 않은 쌀쌀한 주인 아저씨가 말아주는 뻑개장과 순대국의 묘미에 빠져 왕십리를 지나칠 때마다 이 곳을 들른다는 지인들도 여럿이다.

술집들이 12시면 문을 닫아야 했던 과거에도 이 곳은 새벽까지 장사를 했다. 왕십리역 주변에서 몇 차에 걸친 술자리를 끝내고 마지막에 몰려가는 곳은 항상 한양대 정문 건너편이었다. 지금은 출판공장이 되어버린 학사주점, 담근 술을 팔기에 돈 있는 학교 언론사 인간들이 주로 다녔던 사람세상, 라면 안주에 소주가 제공되며 냉동삼겹이라도 먹을라 치면 늘 상추가 없다며 김치를 더 얹어주는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마기집(제대로 읽어야 한다. 잘못하면 마귀집으로 들을 터), 테이블은 4개 밖에 없었지만 바닥에 문을 열면 수십명이 들어갈 지하 벙커 술자리가 일품이던 장원식당까지. 물론 해장국이 맛있는 김제식당도 괜찮다. 그렇게 한양대 정문 건너편 슬럼가도 한 때는 돈 없고 술고픈 이들의 천국이었다.

시간은 흘러 학사주점과 사람세상은 문을 닫았다. 마기집도 예전만 못하다. 장원식당은 주인 아주머니가 바뀐 뒤로는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부귀식당은 여전했다. 24시간 문을 여는 이곳은 늘 낮보다 자정이 넘은 새벽 시간이 되어서야 사람들로 붐빈다. 한양대 정문 건너편의 마지막 천국이었던 부귀식당이 곧 문을 닫는다. 몇 년 전부터 이야기가 나오던 행당동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4월까지는 장사를 접어야 한다는 게 주인 아저씨의 이야기다. 아쉬워하는 손님들에게 주인 아저씨는 37년생인 자신도 이젠 쉴 때가 되었다며 '허허' 웃음소리로 화답할 뿐이다.

뻑개장과 순대국, 술국과 머릿고기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잔에 눌러 담던 건 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누구는 세상에 대한 얼치기 사자후를 내뱉었으며 누구는 눈물을 흘렸고 누구는 연정을 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잘 가거라 나의 20대여.


그나저나 이제 막잔은 어디서 들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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