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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역사/사회/자연과학]평화의 발걸음 - 박노해의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피드백(리뷰)

by 망명객 2007. 8. 18.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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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출간될 때, 난 시인 박노해에 대한 관심을 접기로 했다. 90년대 후반, 학내의 작은 정치조직 하나가 스스로 깃발을 정리하며 박노해후원사업회로 탈바꿈할 때만 해도 내심 그 타이틀 전면에 배치된 이 노동자 시인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건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던 한 사람의 투사에게 보내는 애정이었다. 그가 시를 통해 고발하던 이 땅의 모순들과 울부짖던 그 모순 속의 삶은 그 어떤 논리보다 명확한 이미지였기 때문에 난 그의 글을 좋아했다. 그런 그가 교도소를 나오며 던진 "락밴드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변절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시인 자신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내 독서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물론 행간에서 그의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그때 내게 "사람만이 희망이다"란 주체성을 내세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던 그룹에서 쉬이 인용하는 문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말랑말랑한 감성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상세보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펴냄
시집 <노동의 새벽>의 저자 박노해의 Pamphlet 시리즈, 제2권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 고뇌의 레바논과 희망의 헤즈볼라』. 2006년 7월 13일,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남부도시를 침략했다. 무자비한...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그런 박노해의 글을 다시 집어든 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한국인 피랍 사건을 계기로 아랍사회에 대한 내 관심이 증폭된 데 기인한다. 신문과 방송의 외신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여행금지국가 지정으로 아프가니스탄 현지 취재가 불가능한 상황이니 대략 아랍 사회에 대한 르포물을 통해서나마 아랍권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높여보자는 취지였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끼니도 잊은 채 순식간에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쓴 글과 시, 그리고 직접 찍은 사진들은 하나의 완벽한 르포물이었다. 그 어떤 기사보다도 풍부한 현장성이 책의 행간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기사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했던 백향목 혁명의 나라 레바논. 그 레바논이 2006년에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전쟁을 치루었다는 사실을 난 알지 못했다. 물론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내게 PLO나 탈레반, 혹은 알 카에다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국의 땅에서 분단된 조국을 확인하며 시작한 '샤이르 박'(박노해가 레바논 현지에서 사용한 이름)의 여행은 전쟁의 폐허 속을 거닐며 진행된다. 그의 여정에서는 폭격으로 무너진 자기 집을 향해 돌을 던지는 아이가 있고, 친구의 죽음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절규하는 청춘이 있으며, 가족과 재산 모든 것을 잃은 노인이 있다. 미시적 삶만이 아니라 레바논의 복잡다단한 정치사회적 지형도가 그의 발길 위에서 그려진다. 아울러 다윗의 자손들이 국제협약으로 금지된 화학탄을 레바논에 사용한 사실과, 정말한 스마트 폭탄이 기독교계 부자들의 호화 맨션은 비켜가는 전쟁의 양극화 현상, 헤즈볼라가 단순히 테러를 일삼는 지하드 조직이 아니라 종교도덕적 정당성의 우위에 바탕을 둔 레바논 최대의 정당이자 사회복지 조직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왜 하필 레바논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친절히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이 제공한 이스라엘의 첨단 전폭기들이 죄 없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학살하고 레바논 민중이 애써 재건해 쌓아 올린 삶의 터전을 파괴할 때, 자랑스런 나의 조국 '쿠리아'는 침묵했다. 그런 침묵의 나라 코리아가 이제 다시 레바논에 '전투병' 파병을 준비하고 있다. UN 평화 유지군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레바논 민중 누구도 원치 않는 전투병 파병은 무서운 사태를 자초할 수 있다. 레바논 민중과 헤즈볼라는 지금 코리아의 선택을 준엄하게 지켜보고 있다. 분단 상황에서 미국의 압력에 따른 불가피한 파병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재침공할 때 한국군 전투병이 학살과 파괴를 막아줄 리 없다는 것을 레바논의 아이들조차 잘 알고 있다.(p.286)

현재는 특전사를 주축으로 한 동명부대가 레바논에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언론에서 확인한 동명부대는 평화 유지군으로서 이탈리아로부터 작전 지역을 인계받아 평화 유지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동명부대의 임무 자체가 진정 레바논 민중의 삶에 기반한 평화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박노해의 책을 통해서라면 레바논 현지에서 동명부대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친구일 뿐이다. 그 땅의 주인들이 원치 않는 파병의 문제에 나는 얼마나 무심했던가. 반대를 하더라도 결국 결론은 정부가 추진하는 바대로 끌려가지 않던가.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 육화된 패배의식이 국익논리와 물신주의에 눈을 감고 있었다.

평화. 평(平)과 화(和)라는 두 글자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인류애로서의 평화가 박노해의 발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 터. 당장의 밥벌이에 고단한 삶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더라도 국경 밖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박노해는 성숙한 인간성으로 설명한다.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성의 잣대는 '얼마나 나 아닌 남이 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많은 남이 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세계화 시대의 성숙한 인간성은 국경 너머에서 실현된다. 인간성에는 국경이 없고, 정의에는 국적이 없다. 국경과 인종과 종교와 이념을 넘어 인간성과 정의가 유린되고 아이들이 학살당하는 그곳이 바로 나의 인간성이 떨고 서 있는 자리이기에.(p.286)

국내가 아닌 국경을 넘어 벌이는 박노해의 활동을 접한 뒤, 나는 내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를 인정하고 그의 글과 평화로운 화해를 시도하려 한다. 그리고 책의 끝머리에 그가 밝혔듯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난민촌 '아인 알 할웨'의 현장기록을 조만간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그의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나뉘어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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