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 입구의 버섯농장은 서귀포 항이 내려다보이는 솔동산 언저리 조부모님 댁과 함께 내가 고향이라 칭할 수 있는 곳이다.
겨울의 조부모님 댁은 넓은 창으로 쏟아지는 볕 아래 늙은 고양이의 게으름과 같은 여유가 묻어난 곳이라면 靈室은 한자에서 알 수
있듯 굶주린 혼들의 장소이다. 제 어미의 육신이 일용할 양식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달은 500 아들이 패륜을 가슴에 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500 괴암을 이루었다는 곳, 그 아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의 생명을 이어주던 고된 노동의 현장이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면서도 가난의 애잔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올 겨울 섬에는 눈이 많이 내렸단다. 지난 1월 중 반 이상 눈이 내린 날이었다니 그보다 훨 북쪽 서울에서도 눈 구경하기 힘든데 고향 땅에서 올 겨울 처음으로 눈을 밟아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빨간머리 앤이 좋아하는 '기쁨의 하얀길'만큼 길거나 예쁘진 않지만 여름에는 녹음으로 겨울에는 裸木의 쓸쓸함으로 정든 진입로. 그 끝 낡은 해먹 위에는 어느 여름날 책을 가슴 위에 품고 잠든 내 유년이 묻어있다.
설을 앞두고 동생이 제대를 했다. 강원도 화천 땅에서 실컷 눈 구경하고 왔을 녀석이 기념 삼아 사진 한 장 찍어달란다. 소주 댓병과 고봉밥, 해피라면의 기억을 품고 있는 옛 관리사무실 앞에서...
그래, 올 초부터 시끄러웠던 이등병 자살 사건은 동생의 부대에서 일어났다. 일년에 약 삼백 여명의 사병들이 군대 내에서 죽어간다는데 멀쩡히 제대한 동생이 고맙기만 하다. 이것으로 우리집에는 예비역 육군 병장 장병장이 셋이 되었다.
아버지가 중학생 때 지어졌다는 창고의 지붕이 지난 달 내린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져버렸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건
사람만이 아닌가보다. 이제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여타 1차 산업처럼 이 농장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기름난로. 빨갛게 달아오르는 코일과 코 끝에 걸리는 기름냄새, 난로 위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에 조용히 삶을 반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