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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다리

일상다반사

by 망명객 2007. 8. 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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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맹렬하다. 한낮인데도 초저녁처럼 어두운 교실에서 우리는 국민학교 저학년 학생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하교 후 '엄마표' 점심식사를 놓치고 있었다. 교실에 비치된 텔레비전에서는 어린이용 영화가 나오고 있었고, 담임 선생님은 그 옆 의자에서 졸고 있었다. 창 밖 세상은 온통 물세계이건만, 창 안에선 덤으로 주어진 교실 체류 시간에 따분함만이 넘쳐났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두 눈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박혔고, 뒷자리의 아이들은 시덥잖은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한 편의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며 서서히 앞자리 아이들까지 잡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잦아들자 그 반비례로 커가는 교실 내 소음이 언제 담임 선생님의 낮잠을 깨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지만 교실이란 공간은 엄연히 질서의 공간이지 않은가. 괜히 선생님의 심기를 건들여서 치도곤이나 당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영화 한 편이 끝나기 전, 교내 방송으로 하교령이 떨어졌다. 어디까지나 저학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졸다 깬 선생님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우리들의 뒷통수에 날렸다. 선생님 곁에 남아 집으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있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사는 아랫마을이 아닌 윗마을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우리를 하굣길을 바라보던 그 아이들의 눈빛은 국민학교 저학년생으로서 내가 기억하는 최초이자 마지막 우울함이었다. 

 

그 다음날도 우리는 제때 하교하지 못했다. 또 다른 영화가 텔레비전 화면 위로 흘렀고, 잡담은 계속 이어졌다. 교실 앞문이 열리며 우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6학년 학생 둘과 담임 선생님이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와서야 끊기지 않을 것 같던 잡담이 멈췄다. 6학년 선배들이 손에는 하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제 옆 반 친구가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급류에 휘말려 죽었어요."

 

국민학교 저학년에게 최초의 죽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윗마을로 가는 길에는 배고픈 다리가 있었다. 평상시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에 교각을 세우지 않고 하천의 단면을 따라 시멘트로 발라 양 편 도로를 이어주던 간의 다리를 우리는 배고픈 다리라 불렀다. 주린 배처럼 홀쭉하다해서 배고픈 다리였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봄가을 소풍을 갔고, 그 다리 근처에서 올챙이나 개구리를 잡거나 멱을 감기도 했다. 옆 반 친구는 그 다리를 건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배고픈 다리는 아이들의 생명을 쉬이 앗아가곤 했다. 하얀 상자가 모금함으로 돌고 나면 곧 방학이었다. 다시 배고픈 다리 근처에서 우리는 멱을 감았고, 봄가을에는 그 다리를 건너 소풍을 다녔다.

 

지금은 배고픈 다리를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는 튼튼한 교각을 지닌 다리가 세워졌고, 그 튼튼함을 입증이라도 하듯 다리 건너 윗마을에는 국내 굴지의 IT회사가 들어섰다.


가끔 창문을 때리는 굵은 빗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의 배고픈 다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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