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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어둠

피드백(리뷰)

by 망명객 2005. 2. 2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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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0, 뤼미에르 갤러리>


어둠은 빛의 반대말이다. 인류는 남자와 여자로 나뉘고 세상에는 낮과 밤이 존재하며 인간에게는 기억과 망각이 있다. 볼 수 있는 어둠? 자못 이율배반처럼 들리는 타이틀이 끌리는 건 세상 사 모두 안티노미처럼 흘러가는 것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키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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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Atlanta. 1997. Gelatin silver print. 출처 : 갤러리 뤼미에르 http://www.gallerylumiere.com]


회화는 사진에게 시대의 기록이란 영역을 넘겨주었다. 이제 팩트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 회화는 사물이 아닌 인간 정신의 창조적 재현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고 후발주자인 사진 또한 회화를 따라 팩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 한다.

어떤 분은 '진정한 사진은 다큐뿐이지'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진에 대한 내공이 모자란 나로서는 연출이 가미된 예술사진 또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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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untitled). 2000. Gelatin silver print. 출처 : http://www.agencevu.com]


대부분의 사진이 'untitled'로 한자어로 돌리면 '無題' 정도 되겠다. 학생들의 시화전을 둘러보면 작은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는데, 그건 바로 '無題'라는 제목의 시화를 어느 시화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화전을 자주 찾던 시절에는 '無題'라는 제목의 시화에 제일 낮은 점수를 매기곤 했다. 자신이 쓴 글에 '無題'라는 제목을 붙이는 건 자신의 글에 대한 방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표제가 작품의 내용을 모두 추스를 수는 없다. 이젠 그걸 알기에 '무제'라는 제목 아래서는 제목을 붙이는 재미를 즐긴다. 물론 제목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보고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면 그만인 것이니까.

위 사진 속에서 '격정'과 '정점'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만해 선생은 첫키스의 순간을 날카롭다고 표현했지만 격정의 정점이 늘 날카롭게 추억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끔씩 찾아오는 현기증처럼 격정의 정점은 주변 사물의 외곽선을 허물어뜨리고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까지 허물어 버린다. 정점의 순간을 떠올릴 때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묘사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식하는 주체가 정점에 매몰되기 때문이겠지. 고로 신림동 최군의 연애는 연금술이라는 이야기에 깊이 동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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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untitled). 2000. Gelatin silver print. 출처 : http://www.agencevu.com]

사진 앞에서 '레옹과 마틸다'라 조용히 읊조리다 함께 간 친구가 '퐁네프의 연인들'이라 칭하자 그의 말에 쉬이 동의를 보냈다.

내게는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 걸쳐있는 '퐁네프의 연인들'. 위 사진을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던 시간, 다리 위 드니 라방과 줄리엣 뷔노쉬의 열정적 춤사위에 대한 기억을 뼈 속에 새기는 공감의 순간이라 이야기하자.

막상 이렇게 스토리 한편을 꾸며가려니 렌즈를 응시하는 듯한 여성의 눈빛이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정점은 순간일 뿐, 다시는 그 순간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불안 말이다. 순간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 불안을 잉태한다. 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 않던가. 잠식당한 영혼, 영혼에 대한 구제가 지상 위 종교의 존재 이유라는데, 망상은 이렇게 줄줄이 비엔나처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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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Ackerman. Tuscan, Italy. 2000. Gelatin silver print. 출처 :갤러리 뤼미에르 http://www.gallerylumiere.com]


볼 수 있는 어둠. 빛과 어둠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보완적 관계이다. 아니 빛이 어둠보다 상위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니까.

어두운 방안에서 내 몸의 뼈와 근육 그리고 신경조직까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멀어져 갈 때, 창가 블라인드 사이로 고개 내미는 네온사인 빛줄기가 내 귓가에 불면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시간,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또렷한 그 시간을 죽도록 싫어하긴 했지만 이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 순간은 순간일 뿐이니까.



- 이 글을 쓰다가 이은주 씨의 자살소식을 접했다. '우울증'을 자살 원인으로 보도하는 뉴스를 접하며 우울도 즐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냉소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이미지의 그녀를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고인이 부디 우울증 없는 곳에서 편안하길 빈다. 그래서 오늘 눈이 내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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