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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에서

일상다반사

by 망명객 2009. 1. 21.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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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후배에게 대뜸 "술 먹자고 전화했냐?"고 물었더니 용산 추모집회에 함께 가자고 전화했단다. 술부터 찾은 내 경솔한 입술이 부끄러워 금일은 힘들겠노라는 답을 후배에게 들려줬다.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산적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사태가, 살인이나 다름없는 이 부끄러운 사건을 그냥 묻어둘 순 없었던 것 같다. 내 앞가림도 힘들지만 그래도, 라는 생각으로 급한 일부터 마무리 짓고 가방을 쌌다.

용산의 집회 참가자들이 행진을 시작했단다. 추모집회에 참석하겠다는 내 연락에 후배가 들려준 이야기다. 후배와 종각에서 만나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을지로입구역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경찰병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명동성당 입구에서 집회 참석자들의 깃발이 보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또다른 후배 한 명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고성이 들렸다.

"대학생들이 앞에 서야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저씨 앞에 나서면 다쳐요!"

"119를 불러주세요!"
 
대오의 뒤에선 작은 실갱이가 벌어졌고 누군가 다친 사람을 나르고 있었다. 대오의 앞에선 고함과 구호 속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살인정권 물러가라!"

"이명박은 물러가라!"

거리 구석의 누군가는 보도블럭을 깼고, 거리 복판의 누군가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 한 켠에선 연신 셔터를 누르거나 상황을 생중계하는 이들이 있었다. 깃발과 고함, 구호와 돌맹이가 난무하는 거리에서 난 어지럼증을 느꼈다.

바로 그 곁엔 하늘을 찌릇 듯한 명동성당이 서있다. 어둠에 묻힌 성당의 첨탑 뒤로 남산타워가 빛난다. 그 순간 원근의 법칙은 뭉개졌다. 남산타워가 명동성당보다 커보였다. 성당 건물 아래 성모상 앞, 누군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성모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선 다친 사람에 대한 응급처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명동성당을 뒤로 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피곤했다. 'PRESS'가 찍힌 방석모를 세 개나 든 청년이 내가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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