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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by 망명객 2007. 5. 1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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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인은 아닐지언정 시인이 되어있어야 할 나이가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논리적 인과관계의 틀거리에 맞춰진 삶은 가끔 숨막히듯 사람을 죄어오곤 합니다. 그렇게 생활은 운문보다 산문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시집을 들추었고 장마다 쏟아지는 시어들 속에서 삶의 여백을 찾곤 했었습니다.

 

여러분의 책장에는 어떤 시집이 꽂혀 있나요?

소설과 달리 시집은 손때가 타야 재맛이죠.

 

특히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시집이라면 그 마음은 더욱 아련합니다.

한 권의 책보다 한 병의 소주가 아쉽던 시절.

단돈 오천 원 미만의 선물로 시집만한 선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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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네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애쓴 것 같다. 도와준다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암튼 그렇게도 내가 잘못했다고 본다~. 달력은 3월로 가기위해 분주한데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아프다. 그냥 많이 힘들었거든. 그래서인지 평소에 별로 좋아한 적 없는 봄이 이제는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 열심히 해. (당분간 학원에서 볼테지만...) 급하게 시집을 골라서 잘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넘기다가 맘에 드는 구절이 있더라. '어둠 속에 마음을 가다듬으라, 장거리 원정에서는 새벽 폭풍에 대비하거니와 층층이 빛은 기대하지 말라' 항상 네가 삶과의 투쟁이 아닌 공존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고생 많았다. 안녕. 96.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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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기다란 해변으로,

망치 맞은 만(灣)의 발치로 돌아오니

대서양 천둥의 세속적인

힘만이 보일 뿐.

 

나는 신비할 것 없는

아이슬랜드의,

그린랜드의 나약한 식민지의

초대를 받고, 그리고 문득

 

저들 유명한 침략자,

녹슬어가는 자기네 기다란 검으로

잣대질당하며

오크니와 더블린에 누워 있는 자들이,

 

돌로 지은 배 단단한 선창에

있는 자들이,

녹은 개천 자갈밭에서

도끼질하고 반짝인 자들이

 

바다에 소리 죽었어도

폭력과 직관으로 되살아나

내게 경고하는 목소리임을 깨닫는다 :

기다란 배의 헤엄치는 혀가

 

뒷새김을 남겨 놓았다 -

말하기를 토르의 망치는

지리와 무역에 따라 휘둘렸고,

아둔한 짝짓기와 복수,

 

증오와 온갖 것의 등 뒤에는

거짓과 여자가 있고,

지침이 평화로 자리잡고,

기억은 쏟은 피를 배양했노라.

 

말하기를, "말(言)의 보고에

눕고, 주름 잡힌

네 머릿속 사리와

번득이는 기지에 파고들라,

 

어둠 속에 마음을 가다듬으라.

장거리 원정에서는

새벽 폭풍에 대비하거니와

층층이 빛은 기대하지 말라.

 

고드름 속 기포처럼

네 눈을 틔워 두고,

네 손에 닿았던

진짜 보물이 무엇이었나 하는 느낌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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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대입을 준비해야 할 고3으로 넘어가던 시절에 선물받은 세이머스 히니의 "한 자연주의자의 죽음".

글쎄요,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던 메세지처럼 이 책을 받은 이후 책을 건네던 친구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교보문고의 문학코너에서 모 동인지에 실린 친구의 시를 통해 아직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삶과의 투쟁이 아닌 공존으로 살아가길 빈다는 친구의 이야기처럼 우린 모두 공존을 위해 살아가죠. 현실은 늘 힘겨운 투쟁의 연속일지언정 시의 여백은 공존의 꿈을 품곤 합니다.

 

특별히 힘들 게 없었던 고3 생활.

그래도 수험생, 고3이란 단어가 뿜어내는 긴장감에 움츠러들 때,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은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이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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