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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명객 2008. 8. 1.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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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돌이키건대, 교과서를 제외한 일반 서적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절은 군인이던 시절이였더랬다. 공부 못하는 친구의 책가방이 가장 무겁고 세상의 청개구리들이 늘 그러듯, 책 읽으라 하던 시절에는 술을 가까이 했고 총 들라 했을 땐 책을 가까이 하던 게 나였다.

혹자는 당나라 부대 출신이라 책을 많이 봤노라고 음해성 멘트를 날릴 수도 있겠지만 군대에선, 특히 훈련소 시절에는 내무반에 비치된 '좋은 생각'이나 '샘터' 류의 도덕 잡지에 찍혀 있는 활자들도 섹시해보이기 마련이다. 물론 군입대 전이야 그런 잡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더랬다.

짠밥 안 되는 이등병 시절, 누구나 해봤을 화장실 초코파이 시식의 추억과 함께 건빵주머니에 몰래 숨겨 항문에 힘줄 때마다 읽던 도덕 잡지 글귀들에 대한 추억도 함께 했더랬다. 그 신성한 이등병의 독서 시간에도 막사 화장실 천장의 습기는 늘 경계해야 할 주적이었다. 아롱아롱 방울진 습기들이 신성한 이등병의 책 위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몇 권은 국방부 마크가 선명히 찍혀 '병영도서'란 이름으로 보급이 되었더랬다. 예비군을 접고 민방위로 진출을 꿈꾸는 지금도 기억 속에 새록새록 떠오른 건, 공포의 외인구단의 작가 이현세가 그린 '까치병장' 시리즈였더랬다. 초딩시절 학교를 통해 보급되던 호국보훈 만화 시리즈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역작이었다. 화장실에 숨어 책을 읽던 이등병이 어느새 병장이 되어 개폼 똥폼 잡고 댕길 때 쯤에는 '부자 아빠' 시리즈가 국방부 마크를 달고 보급이 되었더랬다. 연대 경리계원을 보던 회계학과 출신의 후임병 녀석이 제일 좋아했었다.

군대라고 해서 국방부 마크 찍힌 책들만 읽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휴가나 외출 복귀 시, 부대 내로 책을 반입할 수 있었다. 물론 집에서 부대로 소포로 책을 붙일 수도 있었다. 어떤 변태 고참은 늘 '페이퍼'를 끼고 살았으며, 연대 경리계원이던 후임병 녀석은 재테크 관련 서적만 죽어라 붙들고 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건빵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책갈피 문고본 시리즈가 훌륭했다.
중대 서고에는 장정일의 '햄버거를 위한 명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장정일이 시인이었단 사실을 알았더랬다. 그리고 가끔은 '가시고기' 류의 소설도 읽었더랬다. 그런 류의 책들이 서고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충 중대 서고를 다 훑었을 무렵부터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 책 목록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계급장은 짝대기 세 개 이상이 되었으며 대충 내무실에서도 책을 읽을 짠밥이 되었던 시기였다.

군대 간 아들 책 좀 읽겠다는데, 가격은 묻지 않고 책 목록만 죽어라 적어댔다. 덕분에 지금도 내 책장에는 새책이나 다름 없는 '천개의 고원'이 꽂혀 있다. 아버지께 죄송할 따름이다. 불효자는 군대 가서도 불효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 녀석이 책 한권을 추천했더랬다. 그리고 아버지께 책 주문을 했더랬다. 손석춘이 쓴 '아름다운 집'이었다. 역시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소포 수취하러 중대 행정반에 들르라는 고지를 받게 되었다. 그날 따라 중대장은 내가 받은 소포에 관심을 갖고는 '또 책이냐? 혼자만 읽지 말고 중대원들과 돌려 읽어라' 라며 훈수까지 두신다. 그러다 무슨 책이 왔냐며 한번 뜯어보라고 한다. 뭐 별 거 있겠냐며 중대장 앞에서 소포를 뜯다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뜯은 소포 포장 사이로 '아름다운 집'의 책 뒷면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는가.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찾아보기 바란다. 다만 책 뒷면에 쓰인 글귀들이 군대에서 읽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글귀들이라는 것만 밝힌다. 그래도 살아보겠노라고 소포 포장을 다 뜯어 중대장에게는 표지만 보여주었다.

결국 그 책은 탐독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곧바로 영내 구석 구덩이 속에 은폐엄폐를 시켜두었더랬다. 곧장 소각장으로 들고가지 않았던 건 책값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말년휴가 때 그 책을 조심히 모시고 나와 집에다 꽂아두었다. 그 책을 추천했던 친구 녀석은 제대 후에도 술자리에서 죽도록 내 욕설을 들어야 했다.

군대는 그런 곳이였다. 입대 전 내게 권총을 날려주신 교수님의 책도 단지 제목에 '이념'이란 단어 때문에 의심을 받는 곳이 군대였다.

군인이었을 땐 군복만 벗으면 정말 열심히 책을 읽을 것 같더니, 막상 군복을 벗자 인터넷 세상에서 오락을 벗삼느라 책을 멀리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책보다는 논문 쪼가리 읽어 나가기도 벅찬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시절은 늘 아름다움으로만 채워진다더니, 막상 군대에서 읽던 책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시절을 맞이했다. 그러나 다시 군대로 돌아가라면 정중히 사양하겠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논란에 대해 해당 출판사들이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겠다고 한다. 국방부 마크가 선명히 찍혀 보급되는 책들에 대해서도 함께 문제 제기를 좀 해줬으면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책들이 선정되는 건지. 이것도 군납이기에 그 과정은 투명해야 한다.

이왕이면 세계 제일의 고등 군대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군대인 만큼 국방부 선정 도서가 출판계와 지식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있는 목록을 제시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울 것이다. 불온서적 목록을 작성하는 네거티브 전술이 아니라 포지티브한 방향으로의 선회. 21세기 대한민국 국방부에 바라는 소박한 소망이다. 아, 그럼 까치병장과 같은 명작 만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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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니 님의 '불온 서적과 불심 검문의 추억'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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