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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겨울 나그네, 그가 던진 이야기

피드백(리뷰)

by 망명객 2004. 12. 2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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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어수갑, 휴머니스트, 2004

어수갑. 1989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닐 때, 그는 세상을 들썩였던 임수경 방북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면서 다시는 대한민국의 땅에 발 디딜 수 없는 경계인이 되어버렸다. '경계인'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사회변동의 주역이라는 파크의 개념 정의 상 그는 경계인이 아니다. 오히려 망명객이 더욱 그에게 어울리는 수식어일 것이다.

이 책을 집으며 처음에는 그리 탐탁치만은 않았다. 아마 옛 운동권의 향수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전향의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작 책장을 넘기면서 느낀 불편함은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으리라. 아니, 연민보다는 그의 담담한 이야기를 통해 나의 부끄럽고 비뚤어진 삶을 반추하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지천명을 앞둔 그는 자신의 생의 화두를 '사랑'이라 이야기한다.(p.19) 어찌 너무 말랑한 이야기 아닌가? 특별히 감동스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어른들의 잔소리를 흘려듣는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흘려버린다. 생의 화두가 '사랑'이라는 사람이 그 누구에게도 기대는 하지 않는단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느끼는 실망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그 차선책으로 사람에 대해 기대감을 품지 않는단다.(p.55) 여기에서 난 그가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자격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 지독히 공감하면서도 내 머리는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과 삶에 대한 잠언적인 표현들을 거쳐 책의 막바지에 이르러 <사랑한다는 말은 타동사이지 재귀동사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해야지. '나는(너를 수단으로 하여) 나 스스로를 사랑한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아라. 우리는 누구인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자주 그를 수단으로 하여 결국은 나 자신만을 사랑했던가를. 사랑의 상처는 내가 안으로 삭여야지 상대에게 되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p.308-309>는 자신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글이 가슴에 닿는다. 

힘든 시절, 겨울처럼 차가웠던 시대를 해외의 나그네로 살았던 한 인간이 던져준 이야기는 '톨레랑스'의 방법론 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상대방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가르고,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지리라, 그게 살아가는 방식이라 믿어왔던 내 아집이 그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순간이랄까.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겨울나그네 어수갑. 오랜 세월 가슴 한 구석에만 품어왔을 그의 담담한 이야기가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가슴 시리다. 


그래, 어느 친구의 이야기처럼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상세보기
어수갑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간첩으로 몰려야만 했던 어수갑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걸친 삶의 치열했던 기록으로 비뚤어진 역사가 어떻게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는지를 사적인 이야기로 담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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