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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과서 전쟁 (테사 모리스-스즈키)

피드백(리뷰)/짧은 글

by 망명객 2008. 12. 2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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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교과서 전쟁'은 기억의 공유화나 역사적 책임, 역사 교육과 같은 문제가 국가적·국제적인 논쟁의 대상의 되어 역사의 망령이 사회생활에 유례없는 규모로 얼굴을 들이민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역사가 헨리 레이놀즈(Henry Reynolds)는 "역사가 지금처럼 정치적 논의의 중심이 되고, 클리오(그리스 신화에서 역사를 관장하는 신)를 지금처럼 선뜻 불러들인 적이 과거에 언제 있었던가?"하고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 바 있다.(Reynolds 2000. 3) 이 말은 국가적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정치지도자가 점점 더 빈번하게 역사를 동원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정을 두고 한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원주민(Aborigine)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관한 책임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미묘한 정치현안이 되고 있다.
기억의 공유화나 사죄, 역사적 책임이 정치적으로 돌출한 나라는 비단 오스트레일리아뿐만 아니다. 최근 체크와 독일의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저지른 잘못을 서로 사죄했으며, 노르웨이에서는 국왕이 국내의 소수민족(Saami)에 대한 처우를 사과했고, 뉴질랜드에서는 토지를 강탈당한 마오리(Maoris)에 대한 사죄문에 영국의 여왕이 서명을 했다. 또한 미국의 콜린 파웰(Colin Powell) 국무장관은 예전에 진두를 지휘했던 베트남을 다시 방문하여 밀라이(My Lai) 학살 같은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성 논란에 불을 붙였고, 몇몇 미국의 정치가와 운동가들은 노예매매의 피해자 자손에게 보상하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단지 과거의 잘못에 대한 '국가의 죄'를 재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Barkan 2000 참조) 과거는 다른 형태로도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다. 이제 막 21세기를 맞이한 동남아시아에서는 자국의 역사를 굽이굽이 그려낸 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이웃나라와의 분쟁을 다룬 것이 인기를 모은다. 타이의 역사학자인 찬윗 카셋시리(Charnwit Kasetsiri)에 따르면 공식적인 학교교육에서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희박한 반면, 역사의식의 통속적 표현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열광이 대단하다는 점은 기묘한 이분법이다. 제레미 바르메(Geremie Barme)도 1990년대 중국에서 "일반대중의 역사인식이 변화하는 데 명확한 영향을 준 것은" 역사 전문가인 학자가 아니라 "신문, 잡지, 텔레비전, 상업출판을 활동의 장으로 삼는 소설가, 저널리스트, 일부 학자"임을 지적했다.(Barme 1993, 265)
그렇다면 역사의 위기는 단지 건망증의 문제가 아니라 심오한 딜레마를 반영한다. 세계적인 규모의 이동과 함께 급속하게 변화하는 다양한 미디어 시대에 과거에 대한 지식을 세대에 걸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현재의 삶을 과거의 사건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인가? 과거의 어떤 부분을 자신의 과거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과거로 받아들일 것인가?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논쟁에서 자극을 받은 나는 위와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의 교과서 논쟁은 사죄와 역사수정주의를 둘러싼 세계 각지의 분쟁과 마찬가지로, 세대를 걸친 역사 지식의 전달 문제 및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역사적 책임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전반적인 역사의 위기와 세계의 역사가들이 오늘날 당면한 도전에 대한 서술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일본의 교과서 논쟁에 대해 가볍게 논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 우리 안의 과거, 19-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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