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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등 위에서 - 제주 영리병원 도입 논란을 보는 시선

일상다반사

by 망명객 2008. 7. 2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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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등줄기가 남녘으로 달려 북태평양 바다와 맞닿는 솔동산에 병치레가 잦은 아이가 살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얼굴을 지닌 아이는 걸을 기운조차 모자라 늘 할머니의 등 위에서 지내야 했다. 물론 그 아이의 양 발에도 신발이란 게 신겨져 있었다. 봄빛 고사리를 닮은 연한 녹빛의 앙증맞은 고무신이 실내에서도 그 아이의 양발에 걸쳐져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늘 농사일에 여념이 없었고, 아이를 보살피는 건 늘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등에 업고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가 걱정이었다. 잘 먹지도 않는 병약한 아이를, 할머니는 분신처럼 등에 업고 다녔다. 솔동산 할머니들의 사랑방이던 창덕상회 쪽방으로, 동네 아이들이 범접하지 못하던 당집으로, 쥐가 드나드는 구멍이 천장에 나 있던 법화사 스님들의 방으로... 아이는 늘 울음을 달고 다녔다. 장이 약해 쉬이 배탈이 나곤 하는 아이를 할머니는 늘 자신의 등 위에서 어르고 달랬다.

"그땐 네가 정말 미웠다. 사람(어른)이나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지. 그래도 그땐 내가 젊었는데..."

삼십여 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는 할머니의 눈은 시간에 대한 경의로 가득했다. 주름진 눈매 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니 세상이 모든 조부모는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세 번째 자식이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내 아버진 네 번째 자식이다. 내 어머니 역시 내 기억에선 집안의 장녀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기억에선 셋째 딸일 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꽤나 내 머리가 굵어진 이후였다. 집안에 있었던 궂은 일은 늘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한 줄기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얻어 듣게 된다.

"건강은 어떠세요?"

할아버지는 이제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들어 하신다. 그래서 전화는 할아버지가 처음에 받으셔도 곧 할머니에게 넘겨진다. 할머니는 안부를 여쭙는 이야기에 온 몸이 종합병원이라는 말로 대꾸하신다. 올해부터는 된장 만들기도 포기하셨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신다. 이제 과수원이나 밭일을 그만하시라는 손자의 이야기에는 세뱃돈이라도 만들어둬야 한다면서 한사코 노동의 의지를 밝히신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무게감이 없었다지만, 굽어버린 할머니의 등에는 아직도 내가 업혀있는 것 같다. 죽을 날만 기다리신다는 할아버지의 자조와 늘 자손들을 위해 '관세음보살'을 입에 달고 사시는 할머니. 우리의 고향에는 현재 우리의 삶을 키워낸 어른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분들이 계시기에 고향이 의미를 지닌다.

내가 지역으로서 제주를 바라보는 건 늘 할머니 등 위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잠녀일을 하고 텃밭을 갈구며 억척스레 생활을 일구던 제주의 할머니 말이다. 해군기지건설 문제도 그랬고, 이번 영리병원 허용 논란도 마찬가지다. 지역민 없이, 지역 공동체의 동의 없는 정책 집행은 그래서 슬프다. 제주의 대지와 바다 위에서 오늘의 제주를 일군 사람들. 그들의 굽은 등이 더 굽지 않도록 하는 게 지역 정책 수립의 선결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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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영리병원 허용과 관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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