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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주민과의 면회

다민족사회

by 망명객 2009. 10. 1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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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는 차가웠지만 가을 볕은 뜨거웠다. 경기도 화성을 향하는 승용차 안, 나의 뇌가 부족한 아침잠을 호소했지만 차창으로 쏟아지는 가을 볕이 내 두 눈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이 전방에서 사선 방향으로 달려와 다시 뒷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끊임 없는 들판이 이어진 곳, 그 한 켠에 우리의 목적지 '화성 외국인보호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호소 건물은 그리 높지 않았다. 건물의 전면부에선 흡사 동사무소와 같은 친근함과 아담함이 느껴졌다. '법과 질서의 확립'이라 쓰인 현판이 건물 외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구호 하나로 건물 전체가 법치의 위압감을 풍기는 듯했다. 평행한 천칭저울이 그려진 법무부 깃발이 높은 가을 하늘 아래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 이주노동자방송국(MWTV) 활동가 미누의 면회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좁은 면회소 복도에는 각 면회실에서 쏟아져 나온 다국어가 흘러 넘쳤다. 2번 면회실의 흐릿한 창 너머, 어두운 코발트블루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두 줄이 그려진 상하의 운동복을 입은 미누가 나타났다. 늘 웃는 얼굴의 미누와 반가움의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면회 신청자들은 모두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잘 지내요? 지낼 만 해요?"


"우리 모두 잘 지내요. 식사는 잘 하고 있죠?"


짧은 물음에 대해 미누는 꽤 긴 대답을 이어갔다. "괜찮다" "지낼 만 하다"는 게 대답의 요지였다.  그의 대답 후에는 늘 정적처럼 시간이 멈춰섰다. 그럴 때마다 곧 계면쩍은 웃음이 정적을 깨곤 했다. 20분이란 면회시간이 그리 긴 시간일 줄이야. 면회 신청자와 대상자 사이에 놓인 유리 한 장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구획짓고 있었다. 이쪽의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면 미누가 있는 공간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잘 지낸다는 미누의 이야기에 우리 일행은 힘 내라는 응원의 메시지로 화답했다. 미누에게 난 웃는 얼굴만을 보여줬다. 나중에 술 한잔 나누자는 이야기가 혀 끝에 맴돌았다. 하지만 난 끝끝내 그 이야길 전하지 못했다. 면회실을 나서는 내 뒷덜미에 천근같은 후회가 밀려왔다. 면회소를 나서며 뒤돌아 보니, '웃는 얼굴 밝은 미소'라 쓰인 구호가 면회소 대기실 입구 위에 붙어 있었다. 면회 대상자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달라는 보호소 측의 의도는 면회소를 나서는 이들에겐 허탈한 웃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보호소 건물 밖, 제부도 앞바다에서 달려온 바람이 둥그렇게 모여선 일행 사이로 계통을 잊은 채 흩어졌다. 가을 해는 어느덧 바람이 진행해온 방향의 지평선과 예각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이 달려가는 방향에선 육중한 철문이 호송용 버스 두 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우리 일행 역시 같은 방향으로 귀가의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 가을 볕이 내 뒷통수를 달군다. 머리 위에서 햇볕 냄새가 퍼질 것만 같았다. 미누는 다시 이 땅에서 햇볕 냄새를 풍기거나 바람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될까. 법치의 준엄함 아래에서 약한 인연의 고리가 고개를 치켜든다. 법과 제도란 틀이 그 누구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물질적 손실을 끼친적도 없는 한 인간의 사회적 토대를 뿌리채 뽑아버리려 한다. 무려 18년 가까이 쌓아온 토대였다. 인간과 제도의 대립 관계에서 늘 아프고 다치는 건 늘 인간 개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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