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비장의 쎈놈

다민족사회

by 망명객 2010. 7. 13. 01:57

본문

월드컵이 끝났다.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서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벌어지는 동안 난 성동구의 한 구석에서 아프리카 출신 친구를 얻었다. 

 

검은색 피부에 안경 뒤 눈빛이 도드라진 11살 소년. 그와 난 외국인근로자센터 지하에서 처음 만났다. 조심스레 지하 공간을 찾은 그 친구의 얼굴엔 호기심이 한가득이었다. 노트북 화면 너머로 소년에게 말을 붙인다. 

 

"안녕!"

 

가뜩이나 큰 소년의 눈망울이 더 커졌다. 낯선 이에 대한 그의 경계심, 그 두 눈은 흡사 길잃은 강아지의 그것과 닮았다. 공간 곳곳을 둘러보던 소년이 책 한 권을 집었다. 앉을 것을 권하는 내 이야기가 소년의 시선을 빗겨간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언어적 경계가 놓여 있는 듯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한다. 벽면을 장식한 세계지도 앞으로 소년을 이끌었다. 소년의 눈 앞에서 내 손가락은 내 가슴 위와 도면 위 한반도를 오간다. 소년의 시선이 자기 키 높이에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위에 쏠린다. 

 

"사우스아프리카?"

 

"거기 아니에요. 아비장이에요."

 

똑똑한 한국어 발음에 놀라, 난 소년의 이야기를 놓쳤다. 그의 손가락이 남아공 동쪽과 인도양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되물음에 소년은 명확한 발음으로 자신의 출생지를 강조한다. 

 

"아! 비! 장!"

 

'아비장'이라. 소년의 손가락이 길을 잃은 지점을 훑어보지만, 불친절한 세계전도 위에 그의 출생지는 없었다. 어색한 침묵으로 빠지려던 찰나, 소년의 모국어가 궁금했다. 

 

"불어 쓰니?"

 

"예, 불어 써요."

 

"꼬망딸래브, 메르시보꾸!"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소년에게 불어 몇 마디를 붙여본다. 

 

"한국 사람들 불어 발음은 늘 엉망이에요."

 

이 녀석, 면박을 준다. 그래도 괜찮다. 어느새 그의 경계심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와 '아비장'을 검색한다. 네이버는 '아비장'이 코트디부아르의 경제 중심 도시라고 알려준다. 소년의 고향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북쪽으로 몇 개의 국가를 관통한 뒤 다시 대륙의 서쪽으로 달려 기니만에 인접한 곳이었다. 아프리카의 축구 강국인 코트디부아르가 소년의 고국이다. 출신지를 묻는 질문에 국명이 아닌 도시명으로 대답한 이 친구의 의도가 궁금했다. 

 

"여기 혼자 왔어? 엄마나 아빠는?"

 

"엄마는 치료받고 있고 아빠는 죽었어요."

 

소년의 무덤덤한 답변에 어찌 반응해야 할 지, 난 당황했다. 

 

"아빠는 총 맞아서 죽었어요."

 

뭐라 말을 해줘야 하는 건가. 도대체 이 친구는 무슨 사연으로 이역만리의 땅에서 타국어를 자연스레 구사하는 것일까. 내 당혹감과는 상관 없이, 소년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아저씨, 쎈놈 알아요?"

 

쎈놈이 뭐냐는 되물음에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쎈놈'이 인기가 있다는 종잡을 수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소년이 네이버에서 '쎈놈'을 검색해보란다. 동영상 몇 개가 검색결과에 올랐다. 어느새 내 노트북의 주도권은 소년에게로 넘어간다. 집에 있는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소년을 야박하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학교 친구들이 잘해줘?"

 

"에이, 아시잖아요. 학교에 친구 없어요."

 

심드렁한 소년의 답변이 노트북 화면 속 동영상의 비속어만큼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몇 개의 동영상 클립이 재생되는 동안, 난 소년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질문과 귀찮음 가득한 답변이 오갔다. 4살 때 처음 한국에 들어와서 11살이 되기까지, 소년이 겪었을 모든 것을 알기에는 꽤나 모자란 대화였다. 귀찮다 못해 기계적이기까지 한 답변. 이 어린 친구는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꺼냈을까. 이 친구의 신산한 삶은 동일한 질문의 무한반복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끝을 알 수 없는 되물음과 반복적인 대답이 소년의 앞에 놓여 있겠지. 옆 자리에 앉은 소년의 삶이 내 머릿속에 폭 넓은 궤적을 그린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찾아왔다. 긴 원피스를 걸친 그녀의 당당한 체격에서 난 기품을 읽는다. 서글픔이 묻어 있는 기품이다. 자기 아들과 놀아준 내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 그녀가 소년의 손을 잡고 지하실을 나선다. 모자의 뒷모습, 프랑스어 특유의 '붕붕'거림이 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멀어진다. 

 

난민 신청 접수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들 모자가 꽤나 고생스럽게 살고 있다는 게 센터 직원의 설명이다. 이어 당문간 격주 간격으로 어머니의 치과 치료를 위해 센터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센터 직원은 설명했다.

 

 

<Child Soldier in the Ivory Coast, Africa>

 

코트디부아르는 1893년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 1957년 자치정부 수립 이후 1960년 완전 독립을 이룬 이 나라에서는 지난 2002년부터 5년 동안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 내전이 벌어졌었다. 초콜릿의 원료인 코코아 수출대금이 전쟁자금으로 이용됐다. '피의 초콜릿'(blood chocolate)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2~14세의 어린이 28만여 명이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와 혹사,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코트디부아르 출신 프랑스 소설가 아마두 쿠루마의 작품 '열두살 소령'은 내전에 휩싸인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등 서부 아프리카에서 어른들의 싸움판에서 죽어가는 소년병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아비장은 코트디부아르의 옛 수도로 경제적 중심지이다. 현재까지 실질적인 수도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아비장이 내가 만난 모자의 고향이다. 

 

축구 강국으로만 알고 있던 코트디부아르, 그 신산한 역사를 서울의 한 구석에서 읽고 있단 사실은 참 서글픈 일이다. '아비장의 쎈놈'이 월드컵 이면에 가려진 아프리카의 비극을 일깨웠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