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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바르가스는 없다. - 미등록 이주민 2세의 현실

다민족사회

by 망명객 2011. 7. 1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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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호세 안토니오 바르가스. 필리핀 출신인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할 정도로 역량 있는 기자다. 미국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그가 돌연 미등록 이주민이란 사실을 '커밍아웃'한다. 무한경쟁 체제 내에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마음 졸였던 그다. 그는 현재 '드림 법안(DREAM ACT)' 통과를 위해 뛰고 있다. 드림 법안의 정식 명칭은 '외국인 청소년을 위한 개발, 구제와 교육법(Development, Relif, and Education for Alien Minors Act, 약칭 DREAM ACT)이다. 16세 이전에 미국으로 입국해 의회 입법일 기준으로 미국에서 5년 연속 거주한 35세 미만 이주민이 법안 대상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그와 동등한 인증서를 받은 뒤 전문대나 대학교 입학자격을 얻을 경우 조건부 합법체류자격인 6년짜리 임시 영주권을 주고, 그 후 6년 이내에 전문대 이상을 다니거나 군대에서 2년 이상 복무해 개인의 품성이 증명되면 정식 영주권 신청 자격을 부여하자는 것이 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미국은 미등록 이주민 1200만 명 중 16% 정도인 약 200만 명을 미등록 아동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있는 약 6만5천명의 학생들은 진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등록금 문제가 진학을 가로막는 주 요인이다. 미등록이란 이유는 학생 융자나 장학금 신청 과정에서 장애물로 작용하며 이는 직업과 결혼 등 개인의 구체적 삶에서 제약 요건이 된다. 은행 계좌 하나 만들기도 어렵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미등록 이주민 자녀들이 존재한다. 이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있지만 바르가스처럼 모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다 입국한 아이들도 많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부모를 둔 아이들의 신분 또한 미등록이다. 원칙적으론 단순미숙련 이주노동자는 우리나라에 입국할 때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 애초 이산가족 상황을 결심한 채 한국행을 선택한 이주노동자들이다. 혈연의 정 앞에서 법의 잣대는 가혹하다. 부모의 존재 조건인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서 이주노동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생존을 위한 노동과 부모의 조건 사이에 전문 브로커가 존재한다. 아이의 신분에 '미등록'이란 주홍글씨가 붙게 된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파악한 외국인주민 자녀 수는 2009년 기준으로 총 107,689명이다. 이들 가운데 학령기 아동인 만 7세 이상 18세 이하는 43,649명이다. 이들 중 59.6%인 26,015명만이 공교육의 터울 안에 있다. 나머지 17,634명은 그 너머에 존재한다. '이탈'과 '대안교육'이란 빈약한 구분만이 그들에게 들이댈 수 있는 잣대이다. 

바르가스에게 그랬듯 미등록은 이 땅의 이주민 2세들에게도 족쇄다. 이들은 현행 아동복지법 수급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의료, 보건, 교육 등 사회보장의 권리를 이 아이들은 누릴 수가 없다. 보육서비스, 지역아동센터서비스, 급식지원 등 이 땅의 아이들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에서 배제된 삶이 미등록 이주민 2세들이 처한 현실이다. 한겨레21이 미등록 이주민 2세의 현실을 '노동OTL' 연재물에서 다뤘다. 담담하게 현실을 응시한 기사는 저널리즘의 잣대론 흠잡을 데 없지만, 뭔가 1% 부족하다. 생활로서의 노동만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기획에 충실한 만큼 현상을 복합적으로 조명하긴 힘들었을 테다. 미등록이란 건 통장도 인터넷 게임 사이트나 학교 사이트 가입을 위한 아이디조차 만들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학교 행사 있을 때 주민번호 적으라는 것이 있었어요. 비자 없어서 힘들어요. 지원 받을 때, 급식비 지원 받을 때 학년 올라갈 때 주민번호가 필요해요. 학년 올라가면 주민등록 등본 달라고 해요. (급식비) 초등학교 때는 교장 선생님이 그냥 해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중학교에서(주민등록 등본) 달라고 하면 그냥 없다고 해요. 1학년 때는 (주민등록 등본이) 없다고 했는데, 그냥 (급식비를) 지원해 주었어요. 2학년 때도 (주민등록 등본을) 달라고 했는데 없다고 했어요. 결국 (급식비) 신청기한을 놓쳐서 지원 못 받았어요. <G, 아동>" - 인권위, 181쪽.

"비자가 없어서 학교 사이트 들어가는 게 힘들어요. 학교 사이트에서 공부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거 다 못해요. 학교 사이트에서 모든 과목을 다 가르쳐줘요. 동영상 강의도 있고, 시험지도 있고, 풀어볼 수 있는 문제도 있어요. 친구들이 하는 거 보니까 재미있어 보여요. 친구들은 학교 사이트에서 자주해요. 많이 하면 (학교에서) 문화상품권을 타요. 1등에게는 만원 2등에게는 오천원 문화상품권 줘요. 나는 못해서 조금 기분이 나빠요. 컴퓨터 게임 아이디 못 만들어요. (학교 사이트에) 시험문제 정리하는 것도 있어요. 친구들이 보여줄 때도 있고, 그냥 (싸이트 안 보고)교과서로 공부할 때도 있어요. 저희 담임선생님이랑 무리사 담임선생님이 해준다고 했어요. 4학년까지만 해주고 5학년 때는 다른 선생님이 해주신다고 했어요. 다른 친구들 모두 해준다고 했어요. 전교생이 24명이에요. 주민등록번호 만들어주세요. 학교 사이트로 하고 싶고 그래서요. 주민등록번호 만들어주세요. 학교 사이트도 하고 싶고 그래서요. <Z, 우즈베키스탄, 초4재학>" - 인권위, 180쪽.


미등록 부모가 단속에 걸리더라도 아이는 부모를 만날 수 없다. 아이가 단속에 걸렸을 때에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피붙이가 추방되는 것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게 전부다. 체류 기간이 늘어날수록 이주민 2세들은 한국인이 되어간다. 피 안에 담겨 있을 모국의 혼 대신 부딪히며 익힌 한국인의 습속이 한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학원폭력이나 차별은 일상적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여건은 이주아동을 포용하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 작다. 이주민 2세는 반 평균 상승과는 거리가 멀다. 교사 개인이나 학교 단위에서 해결하기에는 이주민 2세가 처한 문제점의 범위가 너무 넓다. 


"중학교 가야 할 때, 선생님이 불러서 '너 비자 없는데, 어떡할 거냐' 하셨어요. (6학년 때) 대회 나갈 때, 시험 볼 때 점수가 안 나와요. 갑자기 애들이...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잘 봤어요. 잘 봐서 너무 행복했는데, 선생님이 불러서 '너 점수 안 나왔어' 했어요. '왜요?' 하고 물어보니까, 등록이 없어서 안 나왔대요. 네. 시험 보기는 봐요. 근데 그냥... 시험 본 것 점수가 나오기는 한데, 무슨 대회 같은 것... 전국 시험 같은 것만 점수가 안 나와요. (학교 시험 등수는 나오고?) 네. (시험 점수가 안 나오면 고등학교 가는 것 걱정되겠네?) 네. 대학교까지 다니고 싶은데 고등학교는 올라갈 거라고 믿어요. 가면 좋겠죠. 고등학교는 힘들다는 얘기만 듣고... <W, 몽골, 남, 중재학>" - 인권위, 179쪽.


미등록이란 제도적 한계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적 장벽이 이주민 2세의 교육을 위협한다. 경제적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학교를 관둘 수 있는 사유로 '경제적 이유로 취업'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이주민 2세의 비율이 18%나 된다. 교육형태별로 구분하면 공교육 터울 안에 있는 이들(13.3%)보다 대안학교(15.8%)에 다니거나 이탈한 2세들(32.5%)의 응답 비율이 높다. 나이가 들수록 비슷한 양상이며, 미등록 2세(32.3%)가 등록 2세(10.7%)보다 경제적 이유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인권위, 169쪽) 이들에게 교육은 멀고 노동은 가깝다.


▲ 한 이주민센터 주최 캠프에서 게임에 참여한 아이들(※ 사진은 본 글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주민 2세들의 교육 희망 정도 조사 결과는 절망을 보듬는 위안이 된다. 응답자의 과반수가 고등교육을 원한다는 결과에서 실낱 같은 희망을 엿보게 된다. 인용한 자료는 중학교 졸업 희망 정도를 "이는 부 또는 모의 체류 자격이 유학생인 경우 부모가 학업을 마친 후 돌아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교육기간을 그 시기에 맞춰 응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고 적시하고 있다. 등록금이나 취업의 어려움이 가져올 절망을 내포하고 있는 결과이지만 예단하긴 싫다. 의심의 끝에 존재하는 비관주의와는 쉽게 결별해야 한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경계해야 하고 의심과 물음을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겉보기와 달리 내 마음은 여리다.

<이주민 2세 교육 희망 수준>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
대학교
(전문대) 졸업
대학원
졸업 이상
결측
합계
 빈도(n) 28
15
93
45
5
186
 퍼센트(%) 15.5
8.3
51.4
24.9
-
100.0
자료 : (인권위, 172쪽)

바르가스는 자신의 삶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비유한다. 미국 남부의 흑인들을 캐나다로 도피시키던 운동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다. 최근의 우리나라 상황으로 환유하자면 '희망버스' 정도 되겠다. 사실 바르가스가 달려들고 있는 드림 법안이 구체화된 건 2003년이다. 이 법안은 미국 상하원에 수차례 소개되었지만 번번히 입법화에는 실패했다.

한국판 바르가스를 꿈꾸는 아이들(?)에게도 현실의 장벽은 공고하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공동체도 이 아이들에게 꿈을 갖지 말라고 이야기하거나 그 꿈을 가로막을 권리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장벽을 뚫을 수 있는 도움이고 관심이다. 바르가스처럼 또 다시 장벽에 가로막히더라도 이주민 2세들이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길 빈다. 언제나 당신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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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랑지 - 인용한 자료를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으로서 내 작업의 결과가 현실을 바꾸길 기대했다. 다국어로 번역된 설문지에 파묻혀 지내던 그때도 비가 많이 내리던 계절이었다. 그 후 1년. 작업의 결과가 현실로 반영되고 있다. 연구 결과가 한 권의 보고서로 만들어진 건 지난해 10월. 그 결과를 토대로 인권위는 교육부와 법무부에 '이주아동의 교육권 보장을 위한 개선방안 권고'를 내렸고 지난달 27일에는 해당 부처의 권고안 수용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뿌듯함보다는 어설프게 날 선 혀에 다쳤을 연구진 선생님들의 상처에 신경이 쓰인다. 미안하단 말 밖에는... 그리고 고맙다. 내게 기회를 줘서. 퍼붇는 비를 바라보며 처마 밑에서 나눠 피우던 담배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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